"지역문제의 본질인 호남문제는 그 원인을 이루는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갖는다. 하나는 유신체제에서 국가와 민간부문의 엘리트 충원에 있어서의 호남배제, 둘째는 지역소외를 해소해 줄 지도자로서의 김대중씨와 호남민 사이의 강한 정서적 유대의 형성, 셋째는 광주항쟁으로 인한 억압의 집단적 경험이 그것이다."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中
최근의 섬노예 논란으로부터 촉발된 반호남주의라는 유령이 이글루스를 배회하고 있다. 앞선 글(
BigTrain 님에 대한 보론: 공간과 시간의 변수화)에서 이미 섬노예 논란이 지역에 대한 비하로 이어져서는 안되는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특정 지역에 대한 과도한 비방들은 통상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수준의 것임이 분명하다. 유사 인종주의를 방불케하는 증오섞인 비방들은 이미 정치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정의로운 방향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있으며, 합리성과 합당성을 모두 결여한, 공론장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할 정신병적 행태에 불과하다(노파심에 말해두자면,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불고기' 따위의 입에 담을 수 없는 의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정 지역에 대해 자신의 경험에서 기인하는 감정적 편견을 없애라고 주문할 수는 없겠지만, 이에 근거하여 정치적 의견을 강렬한 배제와 억압의 성격을 가진 담론으로 표출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미 Amatagoras 님께서 소위 홍어드립이 가지는 타겟의 불명확성에 대해서 지적을 해주셨으며, 과거 지역주의적 담론이 가지는 신화적 성격에 대해서는
"지역주의 논란에 대한 한 가지 참고자료" 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요약하자면 현재 우리가 특정 지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특정한 사회경제적 조건과 정치적 기획에 의한 '만들어진 현실' 이라는 것이다. 사실 2002년 대선후 조사자료를 기반으로 이념 성향을 일차원으로 수치화하여 계산한 강원택의 연구(강원택,『한국의 선거 정치: 이념, 지역, 세대와 미디어』, 푸른길, 2003, p246-248)에 의하면 광주-전라 지역이 가장 진보적이고 대구-경북 지역이 가장 보수적으로 나타나지만, 95% 신뢰수준에서 통계적 유의미성을 검증하였을때, 대구-경북 지역만이 타 지역에 비해 유의미하게 보수적 경향을 띠며 광주-전라 지역의 진보성은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추가적인 자료를 소개하자면, 김진하, "정치의식의 지역차이" 한국정당학회보 제5권 제1호, 2006.2. 에서 발췌한 표들이 있다. 해당 논문은 지역별로 정치적 성향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검증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지역간 성향은 영역별로 교차되기 때문에 특정 지역이 총체적으로 특정한 경향을 띄는 것은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아래에 소개될 도표는 강원택의 연구결과와는 차이가 있으나, 강원택의 연구에 비해 비교적 최근의 조사자료이며, 축이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소개하는 바이다.
이 도표는 "민주주의-독재체제" 와 "민주주의-경제발전" 의 대립항으로 이루어진 문항에 대한 답변을 기반으로 하여 작성된 표이다. 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광주/전라 지역은 전반적으로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모습이 나타나며, 대구/경북 지역은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도는 상대적으로 낮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보다는 민주주의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점은, 광주/전라 지역의 특질적인 정치적 정체성은 타 지역과 영역별로 중첩되는 경우가 많으며, 2가지 축을 분리해서 본다면 각각 인천/경기 및 서울 지역과 강원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가 가장 높지는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의 도표는 좀 더 직접적으로 지역별 정치성향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상당히 흥미로운 결과인데, 앞서 언급한 강원택의 연구와 상반되는 결과가 나온 점은 우선 척도의 축의 개수의 문제가 있을 것이며, 또한 문항의 설계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 도표에서는 정치적 진보성은 외교안보문제로 한정하였으며, 경제적 진보성은 복지 및 재벌문제로 한정하였기 때문에 강원택의 연구 결과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축은 한국 정치에서 가장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축이기 때문에 선별적으로 축을 선정하였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표에서 수치가 낮을수록 보수적인 입장이며, 수치가 높을수록 진보적인 입장이다. 표의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대전/충청을 제외한 여타 지역은 대부분 경제적으로는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부산/울산/경남 지역은 외교안보문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광주/전라 지역을 능가하는 진보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농담삼아 '한국의 모스크바' 로 불리는 울산은 차치하더라도 부산과 경남 지역이 포함된 결과이니만큼 더 흥미롭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지금까지 간략하게 자료를 살펴본 결과는, 강원택의 연구나 김진하의 연구에서나 광주/전라 지역에 대해 '홍어' 와 같이 모욕적 수식어로 지칭할 만한 특질적인 정치적 경향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위의 자료가 다소 간단한 양적 자료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만큼 정치적 지지에 대한 구체적인 양태를 비교할 수도 있겠으나(소개한 자료에서는 역사적 경로에 의한 현실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 여부가 반영이 되어 있지 않다), 결과가 어떻든 특정 지역에 대한 준 인종주의적 편견과 비하가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상도 지역에 대한 기존 김대중-노무현파의 비난 역시 정당화될 수 없으며 비판받아 마땅할 것이다. 다만, 유의해야 할 점은 김대중-노무현파가 경상도 지역의 보수적 유권자들을 비난할 때에도 부마항쟁을 부정하거나 의미를 축소하려는 행태를 보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현재 지역주의적 레토릭을 구사하는 자들의 항변(김대중-노무현파의 전유에 대한 반발)은 자신들의 윤리적 결격사유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사후적 정당화에 불과한 행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동료시민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합리적 판단능력을 모두 결여한 존재에 불과하다. 전유가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전유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괴리가 있기 때문인데, 전유 행위를 비판하면서 전유의 주체로 비판 범위를 한정하지 않고 전유 대상까지 비난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만약 '홍어' 와 '김대중' 이 유사한 속성을 지닌 족속들이라면 왜 '5.18을 팔아먹는' 김대중을 욕해야 할까? 김대중-노무현파의 전유가 불만이라면 전유 행태만을 집어서 비판하면 될 일이다. 김대중-노무현파에 의탁하거나 최소한의 합당성을 결여한 가학적 쾌감에 몸을 맡기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지역문제에 대한 균형잡힌 접근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소개하기 위해 386세대가 쓴 정치학 저작 중 최고의 저작인 박상훈 박사의『만들어진 현실』의 결론부를 인용하는 바이니 정독을 권한다.
지역주의에 대한 하나의 이해 방법
비교의 맥락에서 본 한국 지역주의의 특징
여덟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긴 본론을 통해 필자는, 지역주의 문제에 관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 해석이 왜 잘못인지를 따졌고 따라서 문제를 달리 보아야 함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이제 이 결론에서는 앞서의 논의를 요약하고, 함께 생각해야 할 몇 가지 문제들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치학에서 지역주의란 “문화적 일체감을 공유하는 지역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따라서 지역당 혹은 지역주의 정당이란 이들 지역공동체의 열망을 실현하려는 정치조직으로서, 이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대안은 분리 독립과 자치, 분권이 일반적이다.
그 밖에도 미국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작은 주들에게 부여된 비토권, 스위스와 같이 정부 형성에 소수 정파도 공동 통치자로 참여하는 협의체주의 등이 있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이와는 매우 다른 성격과 내용을 갖는다.
한국은 통치의 지역적 다원성을 특징으로 하는 봉건제의 경험이 없고, 적어도 고려 시대 묘청의 난 이후 단 한 번도 자치나 분리를 지향하는 지역주의 운동도 없었다. 권위의 중앙 집중화와 지방의 강권적 통합을 동반하면서 지역 균열을 만들어 냈던 서구의 근대 민족국가 성립 과정과는 달리, 한국의 경우는 근대 이전에 이미 강한 관료 체제를 통해 민족의 실체적 요소들을 유지해 왔다. 긴 식민 지배와 냉전 체제에서 분단과 전쟁을 경험함으로써 지역을 단위로 한 정체성이 자극될 수 있는 역사적 계기를 가진 것도 아니다.
자율적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지역주의가 집단적 갈등 내지는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사례도 없다. 지역주의 강령을 갖는 지역당이 존재한 적은 더더욱 없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중앙을 향한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동원된다는 점에서 국가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일반적인 지역주의와 다르며 때로 정권의 향배를 두고 격돌하는 과정에서 국가로부터 누가 소외되고 누가 혜택 받는가를 다투는 여야 균열의 다른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대체 한국의 지역주의는 어떤 문제이고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해결해 가야 할 문제인가?
문제는 반호남 지역주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지역주의를 영호남 갈등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이 때문에 모든 지역이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구를 배타적이고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되었다고 비난하곤 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지역을 말한다고 모두가 지역주의라고 비판될 수는 없다. 설령 지역 연고와 같은 전통적 가치에 친화적인 의식과 관행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해서 인위적으로 그 머릿속을 개조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지역들이 중앙정부로부터 더 많은 개발 혜택을 얻고자 하는 이기적 욕구를 갖는다고 이를 있어서는 안 될 지역주의라고 할 수도 없다. 그 전에 가치에 대한 권위적 배분이 중앙집권적 정부에 의해 압도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실부터 문제 삼아야 하고, 정부의 예산 분배 방법을 어떻게 합리화할지를 따져야지 뭔가 나쁜 것으로 가정되는 지역주의로 책임 돌릴 일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유해하고 민주적 가치에 상응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 모두 비판적 자세를 견지해야 할 지역주의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반호남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는 호남 출신에 대한 차별에 그 핵심이 있다. 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반호남주의는 호남 출신에 대해 거리감과 배제적 행위를 동반하면서 엘리트 충원과 경제 발전의 성과를 차별적으로 배분하고 소외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 호남이 동질적 투표 행태를 통해 집단적 항의를 나타냈다고 해서 이를 지역주의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 주류 언론과 보수 세력들에 의해 동원되었던 ‘지팡이만 꽂으면 다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래서 지배 담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호남의 소외 의식이 있기 이전에 호남에 대한 차별이 선행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따라서 지역주의를 무차별적으로 비난하거나 지역 간 맹목적 대립으로 치환해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호남주의라고 부를 만한 유해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반호남주의에 대해 일종의 ‘거울 이미지’로서 과도한 피해 의식이 만들어 내는 지나침 같은 것이라 하겠다. 상대방의 정당한 문제 제기조차 그의 출신 지역 때문으로 확대 해석한다면 그것 역시 잘못된 지역주의라 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 시기 집권 세력 일부에서 당시 노동운동의 강한 정부 비판적 태도를 영남 출신 노동운동 지도부 때문이라며 불평한 적이 있는데 그런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태도 역시 잘못이겠지만. 그러나 크게 보아 그런 호남주의 때문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예는 거의 없기 때문에 과장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지역주의의 근대적 기원
많은 사람들이 지역주의는 옛날부터 있었던 일이라 말하고, 이를 입증하고자 하는 연구들도 많다. 정말 그럴까? 한국의 지역주의는 근대 이전 전통 사회에서 존재했던 지역감정이나 지역 정서, 지역 편견의 연장으로 볼 수 있을까? 아니다. 1장에서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지역주의는 근대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매우 근대적 현상이다. 근대 이후 언제였나? 박정희 정권 시대의 권위주의 산업화 과정에서였다. 이른바 영남 정권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호남의 반대 때문인가? 아니다. 호남은 영남과 더불어 박정희 정권의 등장을 지지했던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대해 전북과 전남의
지지는 각각 54%, 62%였다.
그렇다면 박정희 시대 동안의 불균등 산업화가 낳은 개발 격차와 엘리트 충원에서의 지역 격차 때문인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단지 그것 때문이라면 오히려 산업화의 수혜 지역인 영남과 그렇지 못한 나머지 지역의 갈등이 부각되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 시기 권위주의 산업화의 공간적 특성과 지역주의는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지만 두 차원이 인과적으로 바로 연결될 수는 없다. 1970년대 후반 사회 심리학자들의 조사 자료를 보면, 대체적으로 호남 출신에 대해 여타 지역 출신이 모두 거리감을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950년대까지는 대개 월남한 이북 출신들이 주로 편견의 대상이었는데, 1960~70년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호남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호남에 대한 차별 의식을 가장 강하게 가진 지역민은 영남이 아니라 충청과 서울 경기 출신이었으며, 호남에 대해 가장 덜 거리감을 가졌고 또 호남 출신이 가장 가깝게 생각했던 지역민은 영남이었다는 사실이다. 어찌된 일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산업화로 인한 도시로의 이주는 주로 수도권과 영남의 산업 벨트가 중심이었는데 두 곳에서 생존과 정착, 취업, 소득을 둘러싼 하층의 이주민과 토착민 사이의 경쟁의 양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수도권에는 호남과 충청 출신의 농촌 퇴출 인구가 집중되었다면, 영남의 산업 벨트에는 같은 지역 농촌 인구의 내부 이동이 주를 이루었다. 당연히 영남과 호남의 하층민 간 경쟁의 계기는 약했다. 1970년대 유신 체제하에서 권위주의 정권을 견제했던 야당이 크게 보아 호남 출신의 DJ와 영남 출신의 YS 세력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중요했다.
영호남 간의 거리감이 다른 지역보다 더 크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였다. 잘 알다시피 그 이유는 민주화를 이끌었던 야당의 두 정치 엘리트 YS와 DJ가 서로 다른 정당으로 분열하여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에서 경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호남 사이의 거리감 내지 투표 패턴의 상이함은 상호 지역민이 갖는 본래의 지역감정 때문이 아니라 민주화 직후 야당의 분열이 만들어 낸 정당체제의 구조를 반영했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선거 연구자 중에는 영호남 지역민 사이의 배타적 거리감이 투표 행태를 결정지었다는 기가 찬 분석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 호남 사람이 미워서 그 반대로 투표하고 영남 사람이 미워서 그 반대로 투표한다고 생각하는 발상을 연구란 이름으로 합리화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어느 문학평론가가 한국 정치를 “경상도 전라도 나뉘어서 서로 욕지거리만 해대는” 것으로 묘사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본다면 1987년 선거 당시 YS가 야당의 단일 후보가 되었어도 호남은 그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고 상상해야 하고, 영남 출신 노무현이 90%를 상회하는 호남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지역주의의 정치경제적 기초
한국 지역주의 문제의 핵심을 반호남주의라고 할 때, 그것을 단순히 주관적인 감정과 편견의 문제로 이해한다면 잘못이다. 반호남주의가 자원 분배를 인위적으로 차별적이게 만들고 지배의 한 수단으로 기능한 것은 지역민의 생활 세계가 아닌 정치체제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 기원은 1972년의 유신 체제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는 한국의 선거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흥미로운 사례다. 호남 출신의 김대중과 영남 출신의 박정희가 경쟁한 지역주의 선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으나, 앞에서도 강조했듯 이는 사실과 다르다. DJ는 ‘사쿠라 정당’이니 ‘충성스런 야당’이니 하는 오명에서 벗어나겠다며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근간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대중 경제를 주장했고, 향토예비군 폐지를 공약했으며, 중앙정보부를 국회 심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고, 적대적 남북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주변 강대국이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가져온 반향은 엄청났다.
DJ가 그 이전 같은 당의 윤보선 후보보다 득표율을 가장 많이 늘린 곳은 전남, 그리고 다름 아닌 부산이었다. 부산에서 DJ는 42.6%를 득표했는데, 이는 이전 선거에서 윤보선이 얻은 것보다 11%가 많은 표였다. 대구에서도 이전보다 8.8% 더 득표했다. DJ가 고전한 지역은 영남이 아니라 충청 경기 강원이었다. 결국 전남에서만 10만 표 이상의 무효표가 나올 정도의 부정선거에 힘입어 박정희가 96만 표 차로 승리했지만, 이로써 박 정권이 분명히 인식하게 된 것이 있다. 더 이상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재집권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결과는 유신이었다.
유신 체제가 정상적 통치의 방법을 넘어선 극단적 권위주의 체제였던 만큼, 전보다 더 비정상적인 수단이 필요했다. 긴급조치로 대표되는 억압과 통제는 기본이었고 반공주의는 더욱 노골화되었으며, 반대 세력을 분열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호남에 대한 편견을 동원하고자 하는 욕구도 커졌다. 권위주의와 그 재생산에 이해관계를 갖는 상층 집단들 역시 이런 욕구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다. 그 결과 정부의 고위직, 재벌 기업의 상층 관리직 등에서 호남 출신의 비율은 크게 줄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호남 출신에 대한 편견과 허위의식은 의식적으로 조장되었다. 1979년 부마항쟁과 달리 1980년 광주에서의 항쟁과 비극적 사태가 지역주의적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고, 호남에 급진주의의 이미지를 덧붙이고자 하는 담론들이 작위적으로 동원된 것도 같은 메커니즘이었다.
따라서 상식 세계에 존재하는 전라도 사람들의 기질을 말하고 옛날에도 그런 편견이 있었다는 것을 강변한다 해도, 그것은 인위적으로 동원되고 작위적으로 부각된 결과일 뿐, 사실이 아니다. 문제의 진정한 핵심은 권위주의의 재생산이든 기득권의 방어든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욕구를 실현하는 데 그런 편견의 이데올로기 효과를 필요로 하는 체제와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이를 말하지 않고 국민 의식 개혁 운동을 수천 번하고, 지역 화합 행사를 수만 번 해도, 그건 우리 사회 지역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이데올로기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지역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화
반호남주의가 직접적으로 호남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언어로 표출된다거나 혹은 그렇게 노골적인 방식으로 지배의 욕구를 실현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다. 모름지기 어떤 이데올로기든 권력 효과를 갖기 위해선 나름대로 ‘보편의 옷’을 걸쳐야 하기 때문이다. 2장에서도 살펴봤지만, 1987년 대선 직전 지역주의의 망국적 행태를 비판하는 다음의 인용을 다시 보자.
"모두가 걱정스러운 눈치고, 심지어 두려움 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이러다가는 나라꼴이 엉망이 될 것이라고 개탄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지역감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최근에 와서 지역감정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경향이 노골화(되고 있으며) ……어느 쪽이 먼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상황은 서로 꼬리를 물고 상대방을 자극해서 악순환의 고리에 불을 댕길 것이며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 어떤 폭력적 양상으로까지 발전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같은 시기에 주장된 또 다른 인용을 보자.
"오늘의 상황이 어쩌면 적어도 외견상 1980년 4~5월의 상황과 그렇게 비슷하게 돌아가는지 기분 나쁠 정도다. ……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통령에의 꿈을 버리지 않고, 오로지 매진하는 [그때 그 사람들의 지금 모습]인지도 모른다. …… 3김 씨의 80년 재연을 덮어놓고 사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한가하지가 않다. ……두 김 씨의 이름이 결코 우리 정치의 마법이 아니고 두 사람 아니면 우리는 일어서지도 못할 것 같은 맹신이 언제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두 사람의 추종자들이 깨닫도록 하는 방법은 정말 없을까."
지금이나 그때나 지역감정은 심각했고 그래서 이처럼 우려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위 인용문은 “지역감정” “돌아온 3K”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이 쓴 칼럼 내용의 일부이다. 당시 『조선일보』가 지역주의 문제를 어떻게 정의했는지를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지역당 체제이다. 이는 3김이라고 하는 지역 지배 엘리트가 유권자의 지역감정을 경쟁적으로 자극하여 만들어 낸 지역 할거주의의 내용을 갖는다. 지역주의는 출신 지역이 동일한 정치 엘리트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전근대적 의식 행태로 유권자의 정치적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3김은 유권자의 지역주의를 볼모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따라서 지역당 체제의 극복을 위해서는 구 정치 엘리트의 퇴출과 함께 유권자의 탈지역주의 의식 개혁이 필요하다.’
이런 논리에는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나 고민은커녕 민주화한다고 해서 결국 지역주의의 혼란만 있지 않느냐 하는 식이고, 야당 지도자들은 추종해 봤자 지역감정만 자극할 것이고 그들만 배불리는 결과를 낳지 않았느냐 하는 식이다. 자연스럽게 지역주의 문제는 권위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추종하는 양김의 문제가 된다. 광주와 호남이 적극적인 정치 참여의 욕구를 표현한 것을 맹목적 지역감정이라 말할 때, 이 논리 안에서 5공화국과 전두환, 노태우의 책임 문제는 모두 사라진다. 나아가 정치의 방법을 통한 민주화의 길을 비관적으로 조망하게 함으로써 반권위주의 연합 전선을 약화시키는 효과도 낳았다. 지역주의를 이렇게 보고 지역주의를 극복하자고 하면 그건 결국 양김 내지 3김이 아닌 노태우 후보의 당선, 즉 권위주의 정당이 재집권하는 대안을 추천하는 것이 된다. 야당의 집권을 싫어할 수 있고 노태우의 당선을 바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위한 알리바이를 지역감정 때문이라 말한다면 확실히 인과적으로 전도된 생각이라 할 수 있는데, 당시 『조선일보』만큼 이를 잘 보여 준 사례는 찾기 힘들다.
물론, 지역주의 망국론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이런 논리가 비단 『조선일보』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주류 언론 전체가 『조선일보』의 뒤를 따랐다. 우리 사회 기득 집단과 그 이데올로그들도 민주화 이후 선거 때마다 망국적 지역주의를 앞세웠다. 제도권 지식인들도 대부분 그랬고, 선거 및 정당을 전공하는 정치학자들의 분석도 ‘여전히 지역주의’라는 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불행하게도 지역주의에 대한 이런 해석의 틀을 수용하고 재생산한 것은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자 했던 많은 재야 세력과 진보파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민중당이 있다. 1992년 총선에서 좌절을 경험한 이후 김문수 이재오 이우재 등 민중당 지도부 대부분은 망국적 지역주의 극복과 3김 청산을 내세우며 권위주의 후계 세력인 신한국당에 참여했다. 극좌에서 극우로 이동하는 데 망국적 지역주의 극복만큼 좋은 알리바이 담론은 없었다. 또 다른 예는 제3의 정당을 모색하고자 했던 재야 정치 세력이다. 시민운동의 대표적인 지도급 인사들이 참여한 ‘정치개혁시민연대’, 홍성우를 비롯해 장을병 서경석 장기표 등이 참여했던 ‘개혁신당’, 그 밖에 여러 정치 지향 재야 세력은 통합민주당으로 결집하여 1996년 총선에 참여했으나 참패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지역주의와 3김 정치에서 찾았다. 이듬해 대선을 위해 ‘국민통합추진회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력을 결집한 이들은 “오늘의 정치 현실은 망국적인 지역 할거주의에 기초한 맹주 정치와 붕당정치로써 정쟁만을 일삼고 있다”며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홍성우, 이철 등이 차기 후보로 영입하려 했던 이회창은 한나라당의 후보가 되었다. 제정구, 원혜영, 유인태 등이 옹립하려 했던 조순은 선거 막바지에 “지역주의 극복, 3김 시대 청산”을 이유로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다. 재야 출신의 이부영 김원웅 홍성우 제정구 이철 박계동 등 역시 동일한 이유를 내세우며 뒤따라 한나라당으로 가버렸다. 남은 세력 중 장을병 등 일부는 이인제 후보에게로 갔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김원기와 노무현만이 최종 순간 DJ 진영에 합류했다.
지역주의 망국론은 이처럼 주류 언론, 보수파의 이데올로그 지식인, 학자, 전문가, 마지막으로 여기에 재야 출신 정치 지향 세력이 가세하면서 확산되었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가 한국 정치의 갈등과 대립이 지역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정당은 대개 이 지역주의를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보고 유권자는 이들에 의해 이용당해 지역주의 투표를 한다는 주장이 아무렇게나 개진되게 되었다. 누구도 이런 엄청난 주장을 따져 물으려 하지 않았다. 명실상부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지역주의가 영호남을 넘어 모든 지역을 지배하는 망국적인 문제로 정의될 때, 당연히 가장 응집적인 지역주의 문제 지역은 호남이 된다. 요컨대 ‘지팡이’ 하나로 모든 것이 끝나는 지역, 혹은 차별과 소외를 ‘한’으로 푸는 지역이라는 해석은, 망국적 지역주의론의 다른 짝인 것이다.
1997년 DJ가 집권하고 노무현이 호남의 지지에 힘입어 후보가 되고 대통령도 되면서 지역주의 망국론은 잠잠해지고 사라진 듯했다. 지역주의에 온 몸으로 맞서 싸웠다고 말하는 정치인 노무현이 다수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되고, 영남당과 호남당으로 규정되었던 한나라당과 민주당 주도의 탄핵 사태가 오히려 이들을 궤멸 직전 상황까지 몰고 가는 계기가 되고, 반부패와 반지역주의를 모토로 기존의 집권당을 해체하고 만든 열린우리당이 민주화 이후 최초로 총선에서 과반수를 획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지역주의 때문에 나라 망한다는 주장을 했다면 정말 이상했을 것이다.
취임 초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의 유권자를 민주주의의 승리를 가져온 ‘위대한 국민’으로 정의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모든 것은 국민의 뜻에 따라 하겠다’고 말했다. 탄핵 반대 촛불시위가 전국을 덮고, 열린우리당이 압승하고, 그야말로 잘 나갈 때야 모두들 위대한 시민을 찬양했다. 그런데 2005년 들어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담론은 급격히 달라졌다. 갑작스럽게 한국의 시민들은 ‘지역주의에 사로잡힌 유권자’로 호명되었고, 지도자의 결단이 역사를 이끄는 데 따라야 하는 존재로 정의되기 시작했다. 어제의 위대한 시민은 하루아침에 지역주의 투표나 하는 비이성적 존재로 야단맞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갑자기 망국적 지역주의가 시민들 사이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어서 그랬을까?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은 시민이나 유권자들 속에 있는 지역주의가 아니라, 모든 문제를 지역주의로 설명하면서 상황의 어려움을 지역주의 때문으로 합리화하려는 집권 세력의 욕구에 있었다. 지역주의가 커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화된 지역주의 지배 담론이 또다시 불러들여진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지역주의는 늘 이런 방식으로 이용되고 동원되고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지역주의와 지역정당체제
반호남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지역주의의 지배적 성격과 그것이 망국적 지역주의론으로 변형되어 발휘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강조하고, 따라서 한국 정치를 지역주의로 몰아붙이는 대책 없는 논리를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했지만, 그래도 지역주의는 있는 것 아니냐고 반론할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 근거로 지역별로 표의 큰 편차가 존재한다는 사실, 특정 지역이 특정 정당에 의해 독점적으로 대표되는 선거 결과의 문제를 들 것이다. 요컨대 적어도 표의 지역별 편차만큼 지역주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선거 결과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대표성의 함수이다. 하나는 계층이나 이념적 차이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정치학에서는 ‘기능적 대표 체제’라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지역적 차이 내지 지역적 요구가 표출되는 것으로 ‘지역적 대표 체제’라고 부른다. 이 두 대표의 양식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전자가 표의 지리적 편차를 줄이는 효과를 갖는다면 후자는 표의 계층적 차이를 동질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갈등에 바탕을 둔 정당 이론을 대표하는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의 설명은 단호하다. 선거 결과로 나타난 표의 지역적 편차는 지역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기능 이익에 기반을 둔 갈등의 사회화가 억압되는 정도를 말해 준다는 것이다. 유럽과는 달리 노동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 미국이나, 보수당과 노동당의 이념적 차이가 크게 줄어든 블레어 시대의 영국 선거가 지역적으로 표의 분포가 큰 편차를 보이는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현대 정당 이론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사르토리 역시 지역적 대표성에 기반 한 정당체제 분류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요구를 거절하면서, 표가 지리적으로 큰 편차가 생기는 것은 정당체제의 이념적 범위가 협소할 때 나타나는 일종의 부수 현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당 간 이념적 거리가 분명해지는 이슈가 등장할 때 표의 지역적 응집성은 “불가피하게 분해의 압박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물론 기능적 대표성이 완전에 가까운 정도로 실현된다 해도 표의 지역적 편차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표의 지역적 편차를 가져오는 변수는 매우 많다. 정당들이 어떤 이슈나 갈등을 중심으로 경쟁하느냐도 중요하고, 지역별 산업구조나 계층 구성도 중요하고, 선거제도도 중요하고, 정부 정책이 지역별로 어떤 분배 효과를 낳았는지도 중요하고, 해당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환경도 중요하고, 정당의 전략과 후보자의 개인 변수도 중요하다. 어느 사회든 이 모든 변수들이 지역마다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전국이 똑같은 투표 행태를 보일 수는 없다. 따라서 아무리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도 어느 지역은 어느 정당이 강하다는 설명을 하고 또 듣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지역주의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규범적 판단의 기준으로서 모든 지역에서 표의 분포가 동일해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한국과 같이 중앙정부의 자원 배분 능력이 크고, 주요 정당의 이념적 분포가 협소하고 계층적 기반의 차이도 약하며, 정치 엘리트의 집단적 결속에 있어서 학연이나 지연과 같은 1차적 유대가 크게 작용하고, 주류 언론이나 거대 재벌과 같이 권위주의 구체제의 영향력도 강한 분단국가에서 표의 분포가 동질적이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신화에 가깝다. 이런 사회구조에서는 못 배우고 못 가진 하층에 대해 배제하고 차별하는 지배자적 심리 구조가 커질 수밖에 없다. 어떤 집단이든 이에 도전하고자 한다면 그에 대한 배타적 낙인과 편견은 얼마든지 작위적으로 만들어지고 동원될 수 있다. 과거 4 3 사태 이후 제주가 그랬고, 그 뒤 호남이 그랬으며, 지금은 같은 피를 나눴다고 하는 조선족이 외국인 노동자보다 더 차별받는 운명이 되었다. 따라서 지역이나 출신과 같은 1차적 유대가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구조나 조건을 문제 삼지 않고 선거 결과의 지역적 차이를 무작정 지역주의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사태를 왜곡하는 것에 불과할 때가 많다.
앞서 필자는 한국의 지역정당체제(정당들의 지지 기반이 지역에 크게 의존하고 선거만 하면 지역적으로 크게 다른 한국의 선거 결과)는 지역주의(지역 감정, 지역색, 지역 갈등, 지역 균열 등 뭐라 부르든 정당과 유권자의 행위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지역이라는 차원으로만 보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지역 간 차이가 적은 매우 동질적인 나
라를 대표한다. 인종 언어 문화 종교적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 격차 역시 상대적으로 아주 적은 편이다. 따라서 세계에서 지역 갈등이 가장 심한 듯이 과장하면서 망국적 지역주의 극복을 외치는 것만큼 공허한 것은 없다.
정당들의 지지 기반이 지역이라는 변인에 크게 영향 받게 된 것은 선거 경쟁만 개방되었을 뿐, 권위주의 하에서 주형된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권위 구조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권력과의 거리에 의해서 과도하게 좌우되는 가치의 분배 구조, 그것의 공간적 특성이라 할 수도권으로 초집중화된 사회구조, 소수의 집단이 사회 여러 부분의 혜택을 독점하는 동심원적 엘리트 카르텔 구조, 좁은 이념적 범위 안에서 조직되고 계층적 차이에 의해 차별화되지 못한 보수 독점적 정당체제, 이런 구조와 조건에서 만들어진 하층 배제적 사회 문화 등등, 민주화 이후 응당 개혁되어야 할 것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한국의 지역주의와 지역정당체제는 이런 구조와 조건들 때문에 만들어지고 동원되고 지속되어 온 것이며, 당연히 이런 구조와 조건들이 변화되고 개혁되면서 개선될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국의 유권자와 정당을 사로잡는 지역주의적 욕구 때문이라며 흥분하면서 정작 개혁해야 할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하거나, 그러한 개혁 과제를 회피하는 알리바이로 삼을 일이 아니다.
반지역주의의 이데올로기성
문제를 지역주의적 해석의 틀로 치환해서 보지 말자는 것을 쉬지 않고 말해 왔지만, 좀 다른 관점에서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필자의 접근 방법이 지나치게 지역주의의 폐해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호남에 대한 불이익과 차별이 외형적으로는 크게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속에 호남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많은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속에 호남에 대한 편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진실을 반영한다. 고정관념이든 편견이든 일단 형성된 이후에는 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심리학에서 오랫동안 강조해 온 사실이다. 사회 인류학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듯이,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런 일은 공동체로부터 배제당하는 경험인데, 이 점에서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고 소외되는 지역의 상처는 계급적 차이로 인한 상처보다 더하면 더하지 결코 덜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노동계급이나 사회 하층 역시 차별받고 배제되지만 그래도 이들은 사회변혁의 담지자 내지 보편 계급으로 위안 받을 수 있는 이론이라도 있다.
사회 속에서 인간은 계급이라는 기능적 구조물 위에서 살고 동시에 지역이라는 공간적 기초 위에서 태어나서 생활하다 죽는다. 계급으로만 살아서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계급은 사회체제가 만들어 낸 2차적 산물로서 기본적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의 주제다. 하지만 지역은 훨씬 더 원초적이며, 소속의 경계에서 매우 강렬한 통합력과 소외감을 파생시키는 열정의 원천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지역의 차이가 유해한 갈등을 만들고 때로 비합리성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지역과의 공간적 유대 없이 인간적인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역과 관련된 주관적 인식이나 객관적 정보가 과도하게 비난받고 금기시되게 된 것
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계급의 문제를 과도할 정도로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진보파들이 보이는 반지역적 성향 내지 지역과 계급을 대립시켜 전자를 퇴영적인 것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계층적 차이와 불평등의 문제를 개선하고자 하는 자세가 진정성을 갖는 것이라면 심리적인 상처로는 그보다 덜하지 않는 지역 차별과 소외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관용적이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호남 출신 지식인들이 주장하듯, 한국 사회를 반호남 지역주의에 지배되는 사회로까지 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호남의 역사적 한’을 말하며 지역주의가 긴 역사적 연원을 갖는다고 왜곡하거나, ‘구조화된 지역 대립 구조’, ‘지역 지배 체제’ 등 지역주의의 사회적 기초를 과도하게 강조해 온 논리나 주장에 대해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호남의 피해 의식을 이용해 지역 기반을 독점하려는 정치 세력의 전략적 이해에 기여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적으로 개입하거나 사회적 의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인간 행위의 외면적 결과이지 그 내면까지는 아니다. 적어도 정치적 차원에 국한해 본다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10년의 민주 정부는 호남의 선택이 만들었고, 그것으로써 반호남 지역주의는 더 이상 한국 정치가 해결해야 할 중심 문제의 지위는 벗어났다고 보아야 하고, 적어도 그 이후의 문제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나 도전 세력에게 가혹한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적 차별의 구조 일반으로 문제의식을 넓히는 데 있다. 호남 차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실업자와 비정규직, 조선족과 이주 노동자 등 우리 사회 최저층을 이루고 있는 가난한 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부당한 배제와 차별의 구조로부터 이득을 얻는 집단들은 저항 연합의 최대화를 억제하기 위해 언제든 지역이나 출신, 성, 연령 등 1차적 요인들을 불러들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지역과 관련된 특성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그런 지역성을 작위적으로 동원하고 불러들이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문제라고 이해해야만, 호남 차별의 문제를 개선하는 것과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이 병행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호남 차별의 지역주의가 갖는 여러 잔존 효과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국가, 정당체제, 시민사회로 확대되고 생활 세계로 넘쳐흐르는 효과를 통해 해소되는 다소 긴 시간의 변화를 거쳐 자연스럽
게 사라지도록 해야 할 문제이지, 정치 이념화된 ‘반지역주의’ 내지 거꾸로 전도된 저항적 지역주의로 다시 부추기고 자극할 일은 아닌 것이다.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
지역주의는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이라고, 필자는 늘 생각해 왔다. 따라서 누군가의 정치학 실력을 가늠해 보고자 할 때마다 필자 나름대로는 그가 지역주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예민하게 살펴보곤 한다. 지역주의가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중대 이슈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정치경제적 기반 내지 이데올로기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한국 정치는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지역주의적 해석 틀로 한국 정치를 들여다보는 기존의 접근과는 달리 한국 정치가 안고 있는 어떤 문제들이 지역주의를 불러들이고 있는지를 먼저 질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지역주의 때문’이 아니라 ‘지역주의로 귀결되게 된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구조와 조건’을 더 많이 탐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만이 한국 정치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제대로 주목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문제들이 개선되는 정도에 따라 결과적으로 지역이 중심이 되는 정치적 갈등 역시 점차 줄어들 것이라는 합리적 전망이 가능해질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지역주의 문제는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자체 현실을 못 보게 만드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한국 정치를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기도 한 것인데, 이제 선택은 독자 여러분에게 남겨져 있다. 지역주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독자 여러분은 어떤 안경을 쓰고 있는가? 문제를 달리 보면 잘못은 지역주의 때문이 아니라, 지역주의라는 폐해를 만들어 낸 특정의 구조적 조건이 우리가 해결해 가야 할 질곡이란 것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지역주의냐 아니냐 혹은 어떤 지역주의가 옳으냐를 두고 갈라서 다투기보다는, 우리 안에서 좀 더 폭넓은 공동 행동을 조직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가 더욱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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