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및 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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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cio | 2010/12/31 23:59 | 일상다반사 | 트랙백 | 덧글(8)
만주국의 지배구조와 실상
 최근 가열되고 있는 박정희 논쟁에 제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만주국의 실체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주국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일본군이냐, 관동군이냐' 등과 같은 소모적 논쟁에 휩싸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일 양국의 '만주 인맥' 이 1965년 한일회담에서 손을 맞잡았다는 점이다.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만주국 통제경제를 주도한 시이나 에쓰사부로는 당시 일본 외상으로서 조약문에 서명했고 고마다 요시오 등은 막후의 흑막으로 활약했다. 여튼, 본 글은 연세대 사학과 임성모 교수의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성격 비교 일본-만주국"(역사비평사, 역사비평 1995년 봄호(통권 30호), 1995. 2, pp. 177 ~ 188) 를 발췌요약한 것임을 밝혀둔다.





 만주국 수립 이후 지배체제 확립과정에서 중시된 것은 관동군의 통제 아래 일본인이 지배의 실권을 어떻게 장악하느냐였다. 그것은 일본인 관료의 주도성을 기구적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구조를 필요로 했다(만주국에서는 국적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만주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주국 국민으로 인정되어, 일본인은 일본국적인 채로 만주국 관료가 될 수 있었다).

 만주국 중앙지배기구의 독재적 중앙집권화는 일단 국무총리에게 국정 전반의 책임을 집중시키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집정(황제)를 보좌할 모든 책임은 국무총리에게만 있게 되어 행정 각 부의 총장은 단순한 행정장관에 불과했다.

 이 국무총리의 직속기관이 바로 국무원 총무청이었다. 총무청은 기구상으로는 국무총리의 보좌기관에 불과했지만, 국무원 회의에서 거론되는 모든 의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만주국 지배정책 전반에 관여할 수 있었다. 그 장인 총무장관은 국무원의 제반 업무를 처리하는 가운데, 산하의 인사처·주계처를 통해 인사·예산의 실권을 장악했다. 여타 기구와 달리 국무원은 일계 관료 점유율이 80% 이상이었고, 특히 총무청은 일계가 독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무총리로의 권력집중은 곧 총무청으로의 권력집중, 즉 일계 관료의 주도에 의한 독재적 중앙집권제의 강화를 의미하였다.

 관동군은「부의-혼조 비밀협정」에 의해 확보한 인사권을 배경으로 일본인이 지배의 실권을 장악하는 지배구조에 직접 관여했다. 소위 '내면지도' 라는 것이다. 관동군참모부 제3과(정략·정무 담당)는 그 지도기관으로 기능했다. 제 3과는 총무청으로부터 일계 관료의 채용 등 정치·행정상의 중요 사항에 대해 연락을 받고 그 내용을 심사한 뒤, 관동군참모장 명의로 총무장관에게 가부의 판단을 내렸다. 또한 관동헌병사령부, 군정부고문부 등 만주 내 일본군에 대한 인사권까지 장악, 치안공작과 군사정책 전반에 대한 지도도 수행했다.

 국정 전반에 걸친 제 3과의 내면지도는 수요회의(1941년 이후 화요회의)에서 관철되었다. 이 회의는 총무장관 주재하에 총무청 차장, 일계의 각 부 총무사장 혹은 차장, 처장 등을 총망라해 개최된 정례사무 연락회의로서 매주 수요일에 개최되었기 때문에 비공식적으로 수요회의라 불리었다. 관제상으로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이 회의에서 국무원 회의에 상정될 모든 의안에 대한 심의가 이루어졌다. 만주국의 정책 전반이 이 회의에서 결정되었던 것이다. 관동군 제 3과의 참모들은 이 수요회의에 참가하여 만주국 지배정책에 대한 지도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대만사무국 설치(1934. 12)에 의해 관동군 독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일정한 수정이 가해졌다. 미나미 지로(南次郞; 이후의 조선 총독) 신임 관동군사령관의 부임과 동시에 설치된 대만사무국은 육군대신을 총재로 했고, 외무성·대장성·척무(拓務)성·상공성·육해군성 등 관계 각 성의 국장으로 구성된 참여회의가 두어졌다. 또 각 성의 만주 관계 전문가들이 사무관으로 기용되었다. 관동군은 여전히 만주국 현지의 감독기관으로 그 실권을 유지했지만, 만주국 지배정책은 이제 일본 본국의 각 성이 직접 관여하는 가운데 거국일치체제로 결정된 것이다.

 대만사무국 설치를 전후한 시기에는 일본의 관리가 조직적으로 유입되어 만주국의 행정테크노크라트로 자리잡음으로써 일본-만주국간의 파견·복귀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들이 상공성 관료 시이나 에쓰사부로, 기시 노부스케 등이다. 이들은 제 3기 이후 만주산업개발 5개년계획 등 생산력 확충정책을 추진하였고 일본으로 복귀하여 이른바 '신관료' 의 주축을 이루며 전시체제를 이끌었다.

 만주국 지배체제가 확립된 시기, 만주국의 실권자는 그 이름을 따서 '2키 3스케' 로 불리었다. 호시노 나오키(총무장관), 도조 히데키(관동군 참모장), 기시 노부스케(산업부 차장, 총무청 차장), 아유카와 요시스케(만주중공업 총재), 마쓰오카 요스케(만철총재)가 그들이었다.

 지배체제 성립시기 만주국의 최우선적 과제는 치안유지였다. 구동북군을 비롯한 항일세력의 무장투쟁이 도처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관동군은 독립수비대의 증강을 기본으로 해서 만주국 치안유지를 위한 군사력을 편제하였다. 만주국 전 지역은 5개의 방위지구로 구분되었으며 각 방위지구를 담당한 독립수비대 사령관으로는 중장급이 포진하여 해당 지구에 주둔하고 있는 야전군 사령부까지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각 독립수비대 사령부에는 관동군 참모들이 배속되어 토벌작전의 입안을 담당했다.

 관동군과 종래의 청향(淸鄕)위원회를 계승한 치안유지회가 주축이 된 지방 경비력의 강화로 인해, 구동북군을 중심으로 한 정규부대 편제의 항일무장투쟁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무장투쟁의 중심이 민족주의적 항일의용군 세력에서 점차 공산주의 계열의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으로 이행함에 따라 치안유지체제 전반에 걸친 재편이 요청되었다. 지방민중과 밀착한 유격대 편제의 인민혁명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군사토벌과 함께 민중장악체계의 확립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보갑제(保甲制)는 행정기관의 동원만으로 불충분한 부분을 지탱할 민중조직으로서 제기된 것이었다. 보갑제는 중국 봉건사회의 치안조직으로서, 이미 식민지 대만과 관동주 통치에 채용된 바 있었지만, 만주국의 보갑제는 훨씬 강도 높은 것이었다.「잠행보갑법」(1933.12)에 근거에 시행된 보갑제는 10호를 최소단위인 패(牌)로 조직하고 촌 또는 그에 준하는 구역 내의 괘를 갑(甲)으로 조직하며, 1개 경찰관할구 내의 갑을 모아 최대단위인 보(保)로 조직한다는 것으로서, 각각 지방유력자가 주가 되는 대표를 선출하여 경찰서장-보장-갑장-패장-각호로 이어지는 지휘·감독체계를 구축하였다.

 기초단위인 패에 조직된 농가는 패 내의 치안을 확립한다는 명목 아래 연좌제의 적용을 받았다. 즉, 패 내의 거주자 가운데 이른바 '통비(通匪)' 행위 등 치안을 문란시키는 자가 나올 경우 패 전체가 연대책임을 지고 벌금을 부담해야 했고, 반대로 패 내의 '범죄'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관할 경찰서에 신고할 경우에는 연좌금을 감면해주었다. 또한 보갑은 관할 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보갑 내 18~40세의 장정을 동원해 자위단을 조직해야 했다. 요컨대 보갑제는 지방민중을 상호 감시 체제 아래에 두어 지방의 치안을 철저히 하는 동시에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민중장악을 의도한 것이었다.

 한편 관동군은 만주국 지배체제를 밑으로부터 받쳐줄 민중동원기구로서 만주국협화회(滿州國協和會)를 결성했다. 협화회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민족협화' 를 내걸고, 일본인 독점의 관료기구와 지방농촌을 매개하면서 전민족을 구성원으로 하는 대중조직을 구축하고자 했다. 특히 제제로의 이행 과정에서 민의에 의한 황제 추대라는 외형을 갖추는 데 적합한 운동주체였다. 이후 미나미 취임을 전후한 제1차 조직 개편으로 만주국 정부기구와의 상호관계를 강화한 협화회는, 관동군 및 만주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제 2차 개편(1936.7)을 단행하여 본격적으로 대중화 노선을 표방, 1938년 현재 3천여 분회에 100만의 회원을 거느리게 된다(1944년 4백만). 협화회는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하의 민중동원기구로서 기능했다.

 하지만 '민족협화' 의 지배의 실상은 이데올로기와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민생단이나 간도협조회로 대표되는 민족 분단정책이 조·중 양 민족간에 엄청난 불행을 초래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관동헌병대의「대만(對滿) 전시특별대책」에는 "복합민족 상호간의 반목·이간 대책과 상호 이용" 을 임무 중 하나로 명시하고 있었다.

 또 일본인 관료 중심의 지배체제가 꾸려졌던 만주국에서는 관리급여에서 민족적 차별이 상존했다.「문관 봉급령」(1934. 6) 규정을 보면, 일계의 고위관료들에게 본봉의 4할에서 8할의 특별수당이 지급되었다. 주목할 것은 이 봉급령이 건국 초기의 일·만계 봉급격차를 줄이기 위해 제정되었다는 점이다. 급여차별은 만주국 내에서 줄곧 논란이 되었지만 "각 민족의 능력과 생활정도" 에 상응한다는 미명 아래 결국 해소되지 않았다.

 민족협화 대신 민족차별과 분단이, 하의상달 없는 상의하달이 만주국 지배의 실상이었고, 항시적 전시체제하의 만주국은 각 민족 공존공영의 왕도낙토(王道樂土)가 아니라 일종의 병영국가였다. 이 점은 앞서 살펴본 보갑제 지배하의 상호 감시체제를 통해서도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지만,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혹한 치안법 체계와 집단부락정책이었다.

 만주국의 대표적 치안법인「잠행징치도비법(暫行徵治盜匪法)」(1932. 9)은, 이른바 '비적(匪賊)' 에 관한 형벌법규로서, 항일무장세력의 수뇌나 지휘관급은 극형, 즉 사형에 처하고 관계 사안에 대해서는 상소를 허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즉결처분도 가능하다고 되어 있다. 이른바 임진격살권(臨陣格殺權)이다. 도비법은 이후「치안유지법」(1941. 12)이 생겨 폐지되었지만, 임진격살권은 "당분간 그 효력을 갖는다" 고 규정됨으로써 결국 만주국 붕괴시까지 지속되었다. 이것은 사법제도가 정비된 만주국에서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한편 집단부락정책이란 항일유격운동으로 인해 치안이 불안정한 농촌지역을 대상으로 산야에 분산된 농가를 일정 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키고 무주지대(無住地帶)를 설정한 정책이다. 원래 조선총독부의 지휘 아래 간도지역에서 건설되기 시작했는데, 그 효과에 주목한 관동군에 의해 만주 전역으로 확산된 것이었다. 집단부락은 유격구를 포위하는 형태로 건설되어 항일무장세력의 식량·무기보급로와 정보망, 이동루트를 차단시키는 한편 토벌대의 최전방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보통 100호를 표준으로 1만 평 정도의 규모였는데, 사방에 높이 약 3미터의 토벽을 쌓고 철조망을 친 뒤 주변에 호(壕)를 파 유격대의 접근을 차단했으며, 네 귀퉁이에 망루를 세워 기관총을 설치했다. 강제수용소와 같은 구조였던 것이다. 부락 내부에는 자위대가 만들어졌다. 수용농민들은 낮에는 경찰·자위대의 엄호 아래 주위의 경지에서 경작을 하고 밤이 되면 부락으로 복귀해야 했다.

 관동군의 의도대로 이 정책은 항일무장세력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지만, 한편으로 대상 농민의 사회경제적 모순도 증폭시켰다. 집단부락으로 이주당한 농민은 경지면적이 좁아지고 경작지가 멀어지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을 뿐 아니라 부락 건설에서부터 치안도로의 정비 등 부역으로 인한 부담이 증대되어 부채가 늘고 소작농화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 부락 출입시의 검문·검색과 무주지대로의 출입금지로 인해 생활상의 곤란이 가중되었다. 1940년경 만주국 내 집단부락의 수는 1만 3,400여 개에 달했다.
by socio | 2009/11/07 01:37 | 역사 | 트랙백(1) | 덧글(21)
헌법재판소, 미디어법

 주말에 집에 내려갔다 온 관계로 미디어법에 대한 헌재의 판결의 자세한 내용을 세세히 살펴보지는 못하던 차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뒤늦게 판결과 반응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우선 명확하게 해야 할 점은, 헌재의 이번 결정에 대해 권력에 의해 헌재가 장악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초점이 맞지 않는 비판일 뿐더러 검증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헌재의 9명의 재판관은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각각 3명씩 임명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현재 헌재 구성원들의 임명시기는 9명 모두 2005년에서 2007년도에 걸쳐있으며, 이는 노무현 정부 시기이다(링크 참조).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본인에 의해 임명되었던 이강국, 김희옥, 송두환 재판관의 판결 내용마저도 일관된 경향성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물론 다른 재판관들에 비하면 다소 다른 입장들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헌재를 2MB 의 꼭두각시 쯤으로 파악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논란과는 달리 한국 민주주의에 있어 중요한 문제는 미디어법에 대한 판결 내용 자체라기 보다는 소위 '제왕적 사법부' 에 대한 문제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규정하고 있는 매디슨적 민주주의(Madisonian Democracy)에 의해 규정되어 있으며, 이는 민중의 열정적 에너지와 인민주권을 강조하는 민중적 민주주의(populistic democracy)-대륙적 전통에 기반한-와는 달리 다수의 전제(tyranny of the majority)를 막는 것-영미식 전통에 기반한-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매디슨적 민주주의에 기반한 한국의 삼권분립 체제에서 사법부는 나머지 두 부서를 수평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존재의 이유로 가진다. 하지만 행정부 및 입법부와는 달리 수직적 견제의 원리를 가지지 않는 사법부는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로부터 유리 된 채 삼권 내부의 권력논리에 의해 움직이기 쉽다. 이는 흔히 말하는 행정부에 의한 사법부의 지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의 독립적 권력 추구를 말하는 것이다. 2MB 정부의 무도함을 근거로 사법부 장악을 말하는 자들이 간과하는 점은, 2MB 를 가볍게 능가하는 칠레의 피노체트 치하에서도 사법부는 군부 내부의 파벌투쟁에 편승하여 나름의 자율성을 누린 채로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매디슨적 민주주의에 기반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상원의원의 주별 인원 배분 방식과 대통령 간선제로 인해 인민을 직접적으로 대표하는 기구인 의회의 대표성과 행정부의 대표성이 약화된 상황에서 제왕적 권력을 누리는 것은 사법부가 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익히 아는 부시와 앨 고어가 맞붙은 2000년 대선에서 선거의 결과를 결정지은 것은 인민의 표가 아니라 표를 해석하는 사법부의 판결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어 입법부가 합의하여 내린 결론인 행정수도에 대해 사법부가 나서서 전면무효화 하는 사태와, 비록 스스로의 손으로 사태를 종결시켰음에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 대한 탄핵 근거를 마련해주며 그 운명을 결정지은 사태를 통해 그 정점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사법부, 특히 헌재는 민주주의적 절차의 위에서 게임의 규칙을 결정하는 델포이의 신탁, 바티칸의 회칙으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며 제왕적 사법부로 거듭난 것이다. 그리고 아래에 대한 책임성을 가지지 않고 아래로부터의 대표성이 극히 취약한 이들의 판결은 대부분 사회의 상층이익을 대변하는 경향을 가진다. 이번 미디어법에 대한 헌재의 판결이 어떤 권력 편향성을 가진다면, 그것은 이명박 행정부나 한나라당이 장악한 국회에 대한 편항이라기 보다는 항구적으로 한국사회의 상층이익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언론자본에 대한 편향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이번 헌재의 미디어법 판결은 미디어법 자체에 대한 위헌심판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규율하는 게임의 법칙에 대한 판결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헌재는 미디어법 자체의 내용을 가지고 판단을 한 것이 아니라 익명의 법률 A가 특정한 절차적 잡음을 내고 통과되었을때, 그 법안을 인정해야 하는가의 여부를 두고 판단을 한 것이다. 법리적 판단이 어쨌든 간에 결과적으로 헌재의 판결은 입법부에서 다수결의 원칙을 재가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는 애초에 매디슨적 민주주의에서 사법부가 존재하는 목적인 다수의 전제에 대한 견제라는 의무를 방기한 결정이라는 점이다. 사실 헌재의 이번 결정에 대하여 일면적인 규범적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분명 헌재의 판결은 결과적으로 상층이익과 권력을 차지하는 다수를 지지해주는 판결이지만, 그것은 결과론적 문제이지 헌재의 판결 자체가 가지는 성격은 아니다. 만약 헌재가 미디어법에 대한 무효 판결을 내렸다면 헌재는 소수파의 의정방해 행위인 필리버스터링을 인정해주는 셈이 되는데, 이는 두 가지 문제를 가진다. 첫째, 의회 내에서 자율적으로 형성되어야 할 거버넌스를 외부자인 헌재가 형성해준다는, 제왕적 사법부의 문제(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의 기본 역할은 게임의 규칙을 규정해주는 것이지만 의회 내의 쟁의까지 9명의 재판관이 규정한 법에 의하여 규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가 제기되며 둘째, 필리버스터링 행위는 양날의 검이라는 점이다. 만약 좌파 정부가 집권하였을 때 복지정책 등에 대하여 우파가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공은 다시 의회로 넘어왔다. 이제부터 야당과 시민사회의 역할이 정말로 중요해진다. 헌재의 판결을 놓고 계속 왈가왈부하는 것은 오히려 사회 내에 존재하는 초월적 권위로서의 헌재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꼴이 된다. 집시법 헌법 불합치 결정과 같이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에 맞는 판결이 내려진 경우에는 헌재의 결정을 델포이의 신탁으로 축성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에 맞지 않는 판결이 나왔을 때에는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내팽개치는 것은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헌재의 독립성과 그들의 정치성을 강화시켜줄 뿐이다. 성경의 자구 해석을 놓고 다투던 중세의 신학 논쟁과 민주주의 정치가 다른 점은 자구에서 초월하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 헌재가 자신의 책임을 방기 혹은 현명하게 회피한 것은 헌재 스스로가 제왕적 사법부의 지위에서 잠시 내려와, 역동적인 민중적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호기를 마련해준다. 헌재가 특정의 행동지침을 마련해 주지 않은 공간에서 의회와 시민사회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헌재 결정이 내려지기 전 YTN 노조 노종면 위원장이 인터뷰에서 하였던 말은 오히려 헌재의 결정 이후에 더 중요한 것이다. 헌재의 결정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국민의 의사이다. 물론 자유와 평등이라는 본질적 가치가 침해되는 것을 막는 최후의 보루로서 헌재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나치 시대 법원의 편파적 판결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권력의 변동은 곧 사법부 판결의 변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헌재가 민주주의에서 구원투수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민주주의를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은 소수의 전문가들에 의해 제시되는 신탁이 아니라 인민 스스로가 역동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좋은 정치의 힘이며, 지금은 신탁을 붙들기보다는 정치를 회복해야 할 때이다.

by socio | 2009/11/03 21:36 | 정치 | 트랙백 | 핑백(1) | 덧글(33)
재보궐 선거 폐지론에 대한 약간 다른 시각

 재보걸 선거가 끝나고 나서야 한나라당이 재보궐 선거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링크 참조)이 널리 알려지며 논란이 되고 있다.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한나라당의 이러한 의견은 재보궐 선거 이전에 나온것으로, 선거 결과가 불리하게 나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이 일을 추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여론조사 등으로 좋지 않은 기류를 감지하였기에 이러한 의견이 나왔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는 허태열이 양심고백을 하지 않는 이상 확인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표면상으로 내세운 이유를 주 목적으로 보고 간단히 검토를 해보겠다.

한나라당의 검토안이 야기할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Curtis 님께서 적절하게 지적(링크 참조)해 주신만큼 이 글에서는 다소 이념적인 문제를 다루기로 하겠다. 한나라당이 제기하는 기존 제도의 문제점은 극한의 정쟁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 정당의 과도한 사생결단식 정쟁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는 선거제도가 부과하는 경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협애한 이념 지형 내에서 자신들의 차별성을 강조하려다 보니 일어나는 문제이다. 선거가 사생결단식 정쟁을 유발한다면 선거가 없을 때의 국회는 평화로운가? 선거에서의 사생결단식 대결 구도는 평소의 대결 구도가 그대로 선거 경쟁 구도에 이입된 것 뿐이지 선거로 인해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상대를 절멸시킬 적으로 보는 사생결단식 정쟁을 피하기 위해 선거를 없앤다는 것은 살인을 막기 위해 모든 뾰족한 물건을 회수한다는 것과 다름없는 주장이다. 칼이 없으면 높은곳에서 밀거나 목을 조르는 방법도 있는 법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나라당의 검토안은 노무현의 정치개혁과 같은 이념적 노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선거를 둘러싼 정당 사이의 경쟁을 '사생결단식 정쟁' 이라는, 극도로 부정적인 가치판단을 함축하는 어휘로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갈등을 부정시하고 효율성을 중시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특히 현재까지 한나라당의 행태와 언사로 미루어보아, 이들에게 있어서 왠만한 갈등은 모두 '정쟁' 혹은 '투쟁' 으로 간주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의 숨겨진 의도는 "소모적인 정쟁으로 정치의 효율성이 떨어지니 정쟁을 유발하는 선거를 폐지하여 정치의 효율성을 높이자" 쯤으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정치는 다 더러워' 식의 과도한 도덕주의 담론과 더불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반(反) 정치주의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경제주의적 관점이다. 

우선 정쟁으로 인한 선거 폐지론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앞 문단에서 논의한 바가 있다. 심각한 문제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대표성과 책임성을 담보하고 결과의 불확실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인 선거를 효율성으로 빌미-효율성이 아니라면 '사생결단식 경쟁' 을 굳이 없애야 할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로 폐지할 생각을 다수당인 여당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점은 노무현의 소위 정치개혁이라는 것도 이러한 노선 위에서 이루어졌고, 상당수의 민주당 인사들마저 이러한 명분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 말기의 원포인트 개헌론의 골자는 선거의 비용을 문제삼는 것이었다. 즉, 말하고자 하는 점은 민주주의의 비용-갈등과 자금-을 무시하고 산출지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현재 '비민주적' 이라고 욕을 먹는 한나라당이나 노무현 도당이나 비슷하다는 점이다. 사생결단식 정쟁이 문제라면 사생결단을 없애야지 정쟁을 없애는 것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안타까운 점은 한국의 양대 거대 정당이 모두 정치를 부정하고 효율성으로 대표되는 경제주의적 논리에 포섭되어 있다는 점이다.

최소한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정치개혁은 어떻게 인민의 의사를 올바로 반영할 수 있을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져야 한다. 정치의 비용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추구되어야지 민주주의의 기초 제도인 선거와 기초 동학인 갈등을 죄악시 하는 태도 위에서 절대적 목표로 추구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사회의 갈등에 기초하여 다양한 인민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체제이지, 일군의 정치가 그룹이 효율적인 통치를 통해 인민에게 재화를 제공해주는 체제가 아니다. 효율성을 이유로 민주주의를 희생시킨다면 그것이 궁극적으로 향할 곳은 플라톤식 국가밖에 없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꿈꾸는 시장 유토피아와 노무현이 꿈꾸는 도덕적 유토피아 역시 수호자주의의 망령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한국 민주주의가 향해서는 안될 지점들이다.

by socio | 2009/10/29 14:59 | 정치 | 트랙백 | 덧글(38)
한국연구재단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제목은 거창하게 달았는데 그냥 충격과 공포에서 투덜대는 글에 불과하다. 한국연구재단 선임직 이사로 동아일보 논설위원인 김순덕이 들어갔다. 임기는 올해 6월 26일부터 2011년 6월 25일까지이다(이곳에서 확인 가능) . 이건 이념적 성향을 떠나서 충격과 공포다.
김순덕이 어떤 사람인지는 다음의 글이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김순덕 칼럼과 장하준). 이것은 학술관련된 일을 담당할 최소한의 지성과 양심을 결여하고 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사진이 직접 프로젝트 심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사진 인력 풀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은 걱정이다. 앞으로 한국연구재단과 지식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by socio | 2009/10/17 01:26 | 망상과 불평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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