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열되고 있는 박정희 논쟁에 제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만주국의 실체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주국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일본군이냐, 관동군이냐' 등과 같은 소모적 논쟁에 휩싸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일 양국의 '만주 인맥' 이 1965년 한일회담에서 손을 맞잡았다는 점이다.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만주국 통제경제를 주도한 시이나 에쓰사부로는 당시 일본 외상으로서 조약문에 서명했고 고마다 요시오 등은 막후의 흑막으로 활약했다. 여튼, 본 글은 연세대 사학과 임성모 교수의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성격 비교 일본-만주국"(역사비평사, 역사비평 1995년 봄호(통권 30호), 1995. 2, pp. 177 ~ 188) 를 발췌요약한 것임을 밝혀둔다.
만주국 수립 이후 지배체제 확립과정에서 중시된 것은 관동군의 통제 아래 일본인이 지배의 실권을 어떻게 장악하느냐였다. 그것은 일본인 관료의 주도성을 기구적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구조를 필요로 했다(만주국에서는 국적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만주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주국 국민으로 인정되어, 일본인은 일본국적인 채로 만주국 관료가 될 수 있었다).
만주국 중앙지배기구의 독재적 중앙집권화는 일단 국무총리에게 국정 전반의 책임을 집중시키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집정(황제)를 보좌할 모든 책임은 국무총리에게만 있게 되어 행정 각 부의 총장은 단순한 행정장관에 불과했다.
이 국무총리의 직속기관이 바로 국무원 총무청이었다. 총무청은 기구상으로는 국무총리의 보좌기관에 불과했지만, 국무원 회의에서 거론되는 모든 의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만주국 지배정책 전반에 관여할 수 있었다. 그 장인 총무장관은 국무원의 제반 업무를 처리하는 가운데, 산하의 인사처·주계처를 통해 인사·예산의 실권을 장악했다. 여타 기구와 달리 국무원은 일계 관료 점유율이 80% 이상이었고, 특히 총무청은 일계가 독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무총리로의 권력집중은 곧 총무청으로의 권력집중, 즉 일계 관료의 주도에 의한 독재적 중앙집권제의 강화를 의미하였다.
관동군은「부의-혼조 비밀협정」에 의해 확보한 인사권을 배경으로 일본인이 지배의 실권을 장악하는 지배구조에 직접 관여했다. 소위 '내면지도' 라는 것이다. 관동군참모부 제3과(정략·정무 담당)는 그 지도기관으로 기능했다. 제 3과는 총무청으로부터 일계 관료의 채용 등 정치·행정상의 중요 사항에 대해 연락을 받고 그 내용을 심사한 뒤, 관동군참모장 명의로 총무장관에게 가부의 판단을 내렸다. 또한 관동헌병사령부, 군정부고문부 등 만주 내 일본군에 대한 인사권까지 장악, 치안공작과 군사정책 전반에 대한 지도도 수행했다.
국정 전반에 걸친 제 3과의 내면지도는 수요회의(1941년 이후 화요회의)에서 관철되었다. 이 회의는 총무장관 주재하에 총무청 차장, 일계의 각 부 총무사장 혹은 차장, 처장 등을 총망라해 개최된 정례사무 연락회의로서 매주 수요일에 개최되었기 때문에 비공식적으로 수요회의라 불리었다. 관제상으로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이 회의에서 국무원 회의에 상정될 모든 의안에 대한 심의가 이루어졌다. 만주국의 정책 전반이 이 회의에서 결정되었던 것이다. 관동군 제 3과의 참모들은 이 수요회의에 참가하여 만주국 지배정책에 대한 지도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대만사무국 설치(1934. 12)에 의해 관동군 독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일정한 수정이 가해졌다. 미나미 지로(南次郞; 이후의 조선 총독) 신임 관동군사령관의 부임과 동시에 설치된 대만사무국은 육군대신을 총재로 했고, 외무성·대장성·척무(拓務)성·상공성·육해군성 등 관계 각 성의 국장으로 구성된 참여회의가 두어졌다. 또 각 성의 만주 관계 전문가들이 사무관으로 기용되었다. 관동군은 여전히 만주국 현지의 감독기관으로 그 실권을 유지했지만, 만주국 지배정책은 이제 일본 본국의 각 성이 직접 관여하는 가운데 거국일치체제로 결정된 것이다.
대만사무국 설치를 전후한 시기에는 일본의 관리가 조직적으로 유입되어 만주국의 행정테크노크라트로 자리잡음으로써 일본-만주국간의 파견·복귀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들이 상공성 관료 시이나 에쓰사부로, 기시 노부스케 등이다. 이들은 제 3기 이후 만주산업개발 5개년계획 등 생산력 확충정책을 추진하였고 일본으로 복귀하여 이른바 '신관료' 의 주축을 이루며 전시체제를 이끌었다.
만주국 지배체제가 확립된 시기, 만주국의 실권자는 그 이름을 따서 '2키 3스케' 로 불리었다. 호시노 나오키(총무장관), 도조 히데키(관동군 참모장), 기시 노부스케(산업부 차장, 총무청 차장), 아유카와 요시스케(만주중공업 총재), 마쓰오카 요스케(만철총재)가 그들이었다.
지배체제 성립시기 만주국의 최우선적 과제는 치안유지였다. 구동북군을 비롯한 항일세력의 무장투쟁이 도처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관동군은 독립수비대의 증강을 기본으로 해서 만주국 치안유지를 위한 군사력을 편제하였다. 만주국 전 지역은 5개의 방위지구로 구분되었으며 각 방위지구를 담당한 독립수비대 사령관으로는 중장급이 포진하여 해당 지구에 주둔하고 있는 야전군 사령부까지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각 독립수비대 사령부에는 관동군 참모들이 배속되어 토벌작전의 입안을 담당했다.
관동군과 종래의 청향(淸鄕)위원회를 계승한 치안유지회가 주축이 된 지방 경비력의 강화로 인해, 구동북군을 중심으로 한 정규부대 편제의 항일무장투쟁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무장투쟁의 중심이 민족주의적 항일의용군 세력에서 점차 공산주의 계열의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으로 이행함에 따라 치안유지체제 전반에 걸친 재편이 요청되었다. 지방민중과 밀착한 유격대 편제의 인민혁명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군사토벌과 함께 민중장악체계의 확립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보갑제(保甲制)는 행정기관의 동원만으로 불충분한 부분을 지탱할 민중조직으로서 제기된 것이었다. 보갑제는 중국 봉건사회의 치안조직으로서, 이미 식민지 대만과 관동주 통치에 채용된 바 있었지만, 만주국의 보갑제는 훨씬 강도 높은 것이었다.「잠행보갑법」(1933.12)에 근거에 시행된 보갑제는 10호를 최소단위인 패(牌)로 조직하고 촌 또는 그에 준하는 구역 내의 괘를 갑(甲)으로 조직하며, 1개 경찰관할구 내의 갑을 모아 최대단위인 보(保)로 조직한다는 것으로서, 각각 지방유력자가 주가 되는 대표를 선출하여 경찰서장-보장-갑장-패장-각호로 이어지는 지휘·감독체계를 구축하였다.
기초단위인 패에 조직된 농가는 패 내의 치안을 확립한다는 명목 아래 연좌제의 적용을 받았다. 즉, 패 내의 거주자 가운데 이른바 '통비(通匪)' 행위 등 치안을 문란시키는 자가 나올 경우 패 전체가 연대책임을 지고 벌금을 부담해야 했고, 반대로 패 내의 '범죄'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관할 경찰서에 신고할 경우에는 연좌금을 감면해주었다. 또한 보갑은 관할 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보갑 내 18~40세의 장정을 동원해 자위단을 조직해야 했다. 요컨대 보갑제는 지방민중을 상호 감시 체제 아래에 두어 지방의 치안을 철저히 하는 동시에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민중장악을 의도한 것이었다.
한편 관동군은 만주국 지배체제를 밑으로부터 받쳐줄 민중동원기구로서 만주국협화회(滿州國協和會)를 결성했다. 협화회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민족협화' 를 내걸고, 일본인 독점의 관료기구와 지방농촌을 매개하면서 전민족을 구성원으로 하는 대중조직을 구축하고자 했다. 특히 제제로의 이행 과정에서 민의에 의한 황제 추대라는 외형을 갖추는 데 적합한 운동주체였다. 이후 미나미 취임을 전후한 제1차 조직 개편으로 만주국 정부기구와의 상호관계를 강화한 협화회는, 관동군 및 만주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제 2차 개편(1936.7)을 단행하여 본격적으로 대중화 노선을 표방, 1938년 현재 3천여 분회에 100만의 회원을 거느리게 된다(1944년 4백만). 협화회는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하의 민중동원기구로서 기능했다.
하지만 '민족협화' 의 지배의 실상은 이데올로기와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민생단이나 간도협조회로 대표되는 민족 분단정책이 조·중 양 민족간에 엄청난 불행을 초래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관동헌병대의「대만(對滿) 전시특별대책」에는 "복합민족 상호간의 반목·이간 대책과 상호 이용" 을 임무 중 하나로 명시하고 있었다.
또 일본인 관료 중심의 지배체제가 꾸려졌던 만주국에서는 관리급여에서 민족적 차별이 상존했다.「문관 봉급령」(1934. 6) 규정을 보면, 일계의 고위관료들에게 본봉의 4할에서 8할의 특별수당이 지급되었다. 주목할 것은 이 봉급령이 건국 초기의 일·만계 봉급격차를 줄이기 위해 제정되었다는 점이다. 급여차별은 만주국 내에서 줄곧 논란이 되었지만 "각 민족의 능력과 생활정도" 에 상응한다는 미명 아래 결국 해소되지 않았다.
민족협화 대신 민족차별과 분단이, 하의상달 없는 상의하달이 만주국 지배의 실상이었고, 항시적 전시체제하의 만주국은 각 민족 공존공영의 왕도낙토(王道樂土)가 아니라 일종의 병영국가였다. 이 점은 앞서 살펴본 보갑제 지배하의 상호 감시체제를 통해서도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지만,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혹한 치안법 체계와 집단부락정책이었다.
만주국의 대표적 치안법인「잠행징치도비법(暫行徵治盜匪法)」(1932. 9)은, 이른바 '비적(匪賊)' 에 관한 형벌법규로서, 항일무장세력의 수뇌나 지휘관급은 극형, 즉 사형에 처하고 관계 사안에 대해서는 상소를 허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즉결처분도 가능하다고 되어 있다. 이른바 임진격살권(臨陣格殺權)이다. 도비법은 이후「치안유지법」(1941. 12)이 생겨 폐지되었지만, 임진격살권은 "당분간 그 효력을 갖는다" 고 규정됨으로써 결국 만주국 붕괴시까지 지속되었다. 이것은 사법제도가 정비된 만주국에서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한편 집단부락정책이란 항일유격운동으로 인해 치안이 불안정한 농촌지역을 대상으로 산야에 분산된 농가를 일정 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키고 무주지대(無住地帶)를 설정한 정책이다. 원래 조선총독부의 지휘 아래 간도지역에서 건설되기 시작했는데, 그 효과에 주목한 관동군에 의해 만주 전역으로 확산된 것이었다. 집단부락은 유격구를 포위하는 형태로 건설되어 항일무장세력의 식량·무기보급로와 정보망, 이동루트를 차단시키는 한편 토벌대의 최전방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보통 100호를 표준으로 1만 평 정도의 규모였는데, 사방에 높이 약 3미터의 토벽을 쌓고 철조망을 친 뒤 주변에 호(壕)를 파 유격대의 접근을 차단했으며, 네 귀퉁이에 망루를 세워 기관총을 설치했다. 강제수용소와 같은 구조였던 것이다. 부락 내부에는 자위대가 만들어졌다. 수용농민들은 낮에는 경찰·자위대의 엄호 아래 주위의 경지에서 경작을 하고 밤이 되면 부락으로 복귀해야 했다.
관동군의 의도대로 이 정책은 항일무장세력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지만, 한편으로 대상 농민의 사회경제적 모순도 증폭시켰다. 집단부락으로 이주당한 농민은 경지면적이 좁아지고 경작지가 멀어지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을 뿐 아니라 부락 건설에서부터 치안도로의 정비 등 부역으로 인한 부담이 증대되어 부채가 늘고 소작농화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 부락 출입시의 검문·검색과 무주지대로의 출입금지로 인해 생활상의 곤란이 가중되었다. 1940년경 만주국 내 집단부락의 수는 1만 3,400여 개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