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한 가상토론 by socio

다음은 참여 민주주의(직접 민주주의)자와 대의제 민주주의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상 토론이다. 인용문의 전략된 부분에서는 대의제도에 대한 루소의 견해에 대해 토론이 이루어지며 참여 민주주의 옹호자인 장 자크는 루소의 견해를 인용하며 참여의 문제는 소규모 민주주의에서만 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제임스(대의 민주주의자): 당신과 대부분의 민회민주주의 옹호자들은 당신들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즉각적으로 당신들 주장과 대립되는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이미 시민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들이 결정에 직접 참여할 기회는 필연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른 제약이 없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제약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열 명의 시민이 다섯 시간 동안-회의 시간으로서는 긴 시간입니다- 회의한다면 각각이 발언하거나, 의회 전술을 펴거나, 투표할 수 있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최대한 30분이라는 것을 초등 산수로도 알 수 있습니다. 참여민주주의의 완벽한 예로 소위원회를 들 수 있습니다. 혹은 적어도 소위원회는 완벽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대부분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듯이 다른 여러 일들이 있는 사람들이 한 달에 여러 번, 다섯 시간짜리 위원회에 참여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루소는 위원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국가를 통치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장 자크(참여 민주주의자): 그렇습니다. 국가만이 아니라 다른 조직들이나 결사체들도 민주적으로 운영될 수 있습니다.

제임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참여의 산수로 되돌아가봅시다. 위원회의 규모를 넘어서기만 하면 모든 구성원들이 참여할 기회는 필연적으로 급격히 줄어듭니다. 보십시오. 회의 시간이 여전히 다섯시간이라고 할 때 시민의 수가 백 명을 넘지 않는다면 각각은 3분의 시간을 가집니다. 3백 명이라면 일 분으로 소멸에 다가갑니다. 고대 아테네에서 민회에 참여할 권리를 가졌던 시민의 수는 통상적으로 2만 명이라고 추정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최대한으로 보면 그 두세 배였다고도 합니다. 단지 2만 명뿐이라고 합시다. 다섯 시간짜리 회의에서 시간이 균등하게 배분된다면 각 시민은 회의에 참여할 시간을 1초도 가지지 못합니다!

장 자크: 제임스 씨, 나도 산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계산을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결론으로 이끌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직접 발언함으로써 참여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꼭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2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나의 쟁점에 대해 2만 개의 상이한 관점이 있지는 않습니다. 특히 민회에 앞서서 수일이나 수주,수개월 동안의 토론이 있었다고 한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회의 때는 단지 두세 개의 대안만이 심각하게 토의할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말하자면 각각 30분의 시간을 가진 열 명의 발언자가 그들의 주장을 펴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혹은 30분의 시간을 가진 다섯 명의 발언자라 합시다. 그러면 간단한 질의와 진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을 5분씩 준다면 30명의 사람이 더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임스: 브라보! 당신이 방금 제시한 것을 잘 살펴보십시오. 당신의 민회에서 발언을 하는 능동적 참여자는 35명 뿐입니다. 나머지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듣고, 생각하고, 투표할 수 있습니다. 2만 명의 민회에서는 0.2%도 안 되는 사람만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99.8% 이상이 단지 듣고, 생각하고, 투표할 뿐입니다. 당신의 참여민주주의에서 이루어지는 대단한 특권으로!

장 자크: 이런 숫자놀음은 지루할 뿐입니다. 당신이 시작한 숫자로부터 당신이 원하는 숫자가 나왔습니다. 컴퓨터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오는 법입니다.

제임스: 아마도 이 초등 산수가 지루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참여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숫자가 보여주는 사실을 직시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참여민주주의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숫자를 넣고 그 결과를 곰곰이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완전하고 평등한 기회를 가지고 참여하는 민주주의 체계는 매우 소규모의 집단에서만 가능하다는 결론으로부터 억지를 부리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정확한 숫자가 얼마인가를 토론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민주주의 정부를 구성원이 몇백 명도 안 되는 정치 체계에만 국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고 짐작해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상한선이 천 명이라고 합시다. 아니 만 명이라고 합시다. 그 규모의 민회에서도 대부분의 시민들은 듣고, 생각하고, 투표하는 것 이상의 참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의 체계에서도 또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대규모의 회합-말하자면 천 명이나 그 이상-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대의' 체계입니다. 왜냐하면 소수의 발언자가 발언할 수 없는 다수의 소리를 대변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공정한 대의의 규칙이 없으면 발언자-대의원-의 선정은 자의적이고 우연적이며 불공정할 것입니다. 발언자를 선정하는 규칙을 세운다는 것은 곧 대의 체계에 다가서는 것입니다. 어떤 시민도 발언자로 선정될 수 있고 모든 시민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발언할 사람들을 선정하는 투표를 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 명백한 해결책입니다. 다른 방법을 원한다면, 대의원의 선정을 추첨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을 택하든 대의 정부를 피하고자 당신이 모색하는 체계보다는 공정한 체계가 될 것입니다.

장 자크: 그렇지만 당신과 나의 해결책 사이에는 여전히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대의 체계에서는 대의원들이 정책을 선택하기 위한 투표를 합니다. 선출되거나 임의로 정해진 발언자가 있는 민회에서는 시민들이 정책에 대해 투표합니다. 그러므로 시민들은 대의 정부하에서보다 결정에 있어 직접적 통제를 여전히 더 많이 하게 됩니다.

로버트 달,『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문학과 지성사,1999, p. 428-431


후략된 부분에서 제임스는 현대사회에서 민회 참여의 부담을 언급하며 장 자크는 키부츠의 예시를 들며 참여 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역설한다. 제임스는 키부츠의 참여율을 근거로 소규모 공동체 사회의 대안 가능성을 부정하며, 설령 핵전쟁 등으로 인해 국민국가가 소규모 공동체들로 나뉜다 하더라도 공동체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종국에는 대의제를 채택하는 거대 국가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장 자크는 거대국가의 부상에 대한 반대동맹 결성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거대국가의 성립 가능성에 대해 부정하지만, 제임스는 반대동맹 역시 대의체계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결사체라고 논박한다. 결국 제임스는 대의제가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을지라도 차선의 민주주의가 최선의 비민주주의보다 낫다는 결론을 제시하며, 장 자크 역시 제임스의 주장을 인정하지만 참여의 문제는 계속 고민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가상 토론이 종결된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최소한 투표에 있어서는 민회나 투표장에 직접 갈 필연성이 줄어든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장 자크의 저러한 주장에 대한 또 다른 반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물리적 의미의 직접성을 강조하게 되면, 정치참여는 궁극적으로 투표 참여로 귀결되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 예컨대 정책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의 일환으로 투표라는 제도를 확대할 수 있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은 정책에 대한 전자투표를 가능하게 하기에 이러한 참여의 직접성은 더욱 더 큰 영향을 발휘할 수 있다. 문제는 투표형 직접 참여의 방식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 이 방식은 국민투표형 민주주의(plebiscitarian democracy)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방폐장 건설과 관련되어 실시된 국민투표는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정부가 관여하지 않은 부안 지역의 주민 투표는 부결되었다(2004년 2월 14일 실시, 투표율 72%, 반대 92%). 그러나 2005년 11월 2일 정부가 직접 관여한 주민투표는 경주, 군산, 영덕에서 각기 89.5%, 84.4%, 79.3%의 압도적인 찬성 결과를 보였다. 이처럼 국민투표형 민주주의는 논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혹은 결사체 민주주의(associational democracy)의 원칙이 생략되고, 나아가 기존의 의회라는 대표기구를 우회하면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종종 민주적 정치과정을 회피하는 알리바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인터넷 전자투표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으로 과장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심각한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박동진·박상훈·박정의·윤성이·조현연,『인터넷과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6, p. 113

덧글

  • Daimon 2009/09/06 02:39 #

    저는 제임스의 주장에 더해 (민회참여의 부담과는 별도로) 직접 민주주의에서는 개인이 사안들에 대한 의사결정에 앞서 숙고해 볼수있는 정보와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비 민주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각기 열띤 관심을 가지고있는 분야가 있는 반면에 전혀 알고싶지도 않은 사안 역시 있겠지요.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기 전의 투표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대의제의 국회에서 상임위원회를 두어 본회의 투표에 앞서 검토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인데 직접 민주주의에서는 이런 검토의 과정들이 생략되게 되지요.

    만일 참여제 민회에서의 토론이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고 하여도 다수의 참여를 가능케하는 전자투표를 전제로 한 직접 민주주의에서는 민회의 참석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문제점이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무엇이 민주주의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다르기에 대의 민주주의자들과 직접 민주주의자들의 의견은 서로 인정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결국에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좀 거칠게 이야기한다면 "토론과 숙고를 거치지 않은 직접적인 통제가 민주주의로서 의미를 가질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정도까지 온다면 그 차이는 이성이 아닌 믿음의 영역에 해당되는 것 같아 좀처럼 간극을 좁히기가 어려울듯 싶습니다.
  • socio 2009/09/06 22:01 #

    지적하신 말씀대로죠. 특히 현대사회에서 고도로 전문화된 과학기술과 같은 영역은 비전문가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에는 그 위험부담이 매우 크죠. 참여제 민회에서 토론의 문제점은 본문에서 제임스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뒤에서 지적하신 부분은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라는 고전적 문제와 연결될 것 같습니다.
  • Daimon 2009/09/06 23:07 #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가 가능한가'의 부분과도 연결될듯 싶은데 장자크가 예시로 든 키부츠의 사례에 대해 짧게나마 부연설명을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위에 제임스가 반박했듯이 특수한 소규모 공동체인 키부츠의 사례가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 근거로 언급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키부츠라는 공동체 그 자체로는 무척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검색을 해봐도 아주 기본적이거나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들 뿐이라 저 글의 본문에서는 어떤 점이 다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
  • socio 2009/09/06 23:09 #

    장 자크: 아닙니다. 참여민주주의는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 실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키부츠는 농업만이 아니라 제조업, 상업에서도 매우 효율적인 생산단위입니다.

    제임스: 그렇다면 당신은 참여민주주의가 키부츠와 같은 공동체만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공동체에서 살고 일할 것인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는 한 그러한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95%의 사람들은 키부츠에 살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순수한 자발적 공동체가 인구의 극히 적은 비율 이상을 끌어들였던 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중국의 인민공사도 매우 강압적으로 창출되었고 농촌 사람들을 그 속에서 살도록 강제하지 않자 바로 해체되었습니다.
  • socio 2009/09/06 23:10 #

    저도 키부츠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으나, 일반론적 차원에서 보자면 소규모 공동체일수록 상호감시가 잘 이루어지고 전근대적 유대관계로 묶일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자유주의적 원리가 작동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 Daimon 2009/09/06 23:28 #

    감사합니다. ^^

    키부츠의 참여율을 근거로 반박하였다고 하여 혹 그 공동체 내부에서도 정치적인 부분에서 개인의 참여율이 저조해진다는 등의 문제점이 발생하였나 싶었는데 그런 내용은 아니었군요.

    지난 밤의 구글링에서는 키부츠 경제의 비효율성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는데 저 책이 쓰여진 이후 십년 가량의 시간 동안 다양한 검토와 연구가 있었나봅니다. 쓰여질 당시에는 아니었겠지만 왠지 장자크가 아전인수식의 주장을 하는듯하여 점점 더 싫어지는군요ㅎ ^^;;;


    좋은 포스팅과 답변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 socio 2009/09/07 11:50 #

    키부츠라면 중학교 시절 사회 교과서(도덕 교과서였나;;)에 나왔던 내용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저도 덕분에 키부츠에 대해 다시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후에 따로 포스팅을 하겠지만, 많은 연구에 의해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조차도 이상적인 직접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밝혀진 시점에서 이념형의 직접 민주주의를 설정해 놓은 채 그것을 현실에 실현시킬 것을 강변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의 문제는 부정적 결과를 낳지 않는 한 항상 고민되어야 할 문제겠죠).

    저도 좋은 덧글 감사드립니다 ^^
  • 건더기 2009/09/09 06:52 #

    deliberative democracy를 논의 민주주의로 번역했군. 원래 숙의나 심의로 번역하지 않나? 뭘로 해도 참 와닿지 않는 용어기는 하지만...
  • socio 2009/09/22 13:28 #

    그러고보니 그렇군요. 심의 민주주의 하면 예전에 들었던 학교로 선본의 안습스러운 일화만 떠오르는......
  • ghistory 2010/05/28 11:55 #

    다시 보니 이 글은 앞서 '직접민주주의' 를 비판한 socio씨의 글에 성찰성이 낮은 트랙백을 걸어 '직접민주주의, 그까지꺼 저질러서 해버리면 그만이다' 라는 주장을 감행한 Picketline 씨에의 철저한 이론적 반박으로서 손색이 없군요!
  • socio 2010/05/28 23:45 #

    정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들을 가지고 하는 실험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고려 없이 사회공학적으로 원하는대로 설계와 보수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다소 순진하거나 오만한 견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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