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진의 바보같은 설문지 by socio

 전국적 학생운동 조직인 "전국학생행진" 에서 10월 8일에 학교에서 민주주의 포럼을 개최한다고 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설문지를 돌리길래 하나 집어왔다. 사실 설문지의 경향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지만, 설문지를 보고 느낀 점은 "이것들 학교 부정입학 했구나" 였다. 사회조사입문이나 연습은 수강하지 않더라도 고등학교 사회문화만 배웠더라도 이런 괴악한 설문지를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굳이 해설은 하지 않겠지만 직관적으로 보아도 바보같은 문항 몇개만 감상하자.

-왜 민주주의 제도가 여러분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1. 정치적 불평등만 해소했을 뿐 경제적 불평등은 해소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2. 직접민주주의가 아닌 대의민주주의의 한계
3.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4. 정치적 무관심으로 인한 유일무이함
5. 대한민국 정당정치의 한계
6. 그 외 ( )

-노무현 대통령은 깨끗하고 서민적인 이미지로 당선이 되었지만 집권 후반기엔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 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이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존재했습니다. 이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1. 국민과 소통하는 척만 했을 뿐 실상 요구가 받아들여진 적은 없다
2.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에
3. 한미 FTA, 이라크 파병 등 반서민적 정책
4. 조중동과 야당의 흠집내기 성공
5. 노동자민중의 권리 요구에 대한 무차별적 탄압

-민주주의가 확장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인식 조사입니다.

1. 다음 선거에서 제대로 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다
2. 한국 사회의 법체계를 바꾼다
3. 개인들이 스펙을 열심히 쌓아서 성공한다
4. 전 국민이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을 열심히 한다
5. 정부와 기업의 권력을 시민들이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6. 87년 6월 항쟁, 2008년 촛불처럼 집단적으로 거리의 정치를 만들어간다.
7. 그 외 ( )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의 조건 중 하나로 대중의 계몽된 이해를 제시한 바가 있는데, 아마 한국 민주주의는 행진 때문에 안될 것 같다. 한국 학생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들의 무지를 자각하지 못한채 계몽주의적 자세를 취한다는 데에 있다.

핑백

덧글

  • 2009/10/04 04:0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socio 2009/10/04 04:04 #

    설문지 서두에 써져있는 안내문을 보니 그렇다고 해서 더욱 걱정입니다. 장문의 주관식 문항도 상당수 포함하고 있는지라 이걸 어떻게 계량화 해서 반영할 것인지도 의문이네요. 자기들 입맛에 맞는 답변만 뽑아서 하지 않을까 의심중입니다만......
  • 페이비언™ 2009/10/04 12:12 #

    그나저나 행진은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지' 여전히 감감무소식입니다. '반신자유주의'와 '수평적 연대'를 지향하는 것까지는 아무래도 좋은데, 거창한 노선에 비해서 활동 내용은 그냥 집회 뛰고 농활가고 포럼이나 강연 좀 개최하는 옛날 방식 그대로를 고수하고 있으니 이거 참. 한대련처럼 차라리 정당운동에 뛰어들면 수긍이라도 가지요.

    대학생의 탈정치화가 팽배한 오늘날 학생운동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까지 폄하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시대 '민중민주주의자들'의 학습능력은 그들의 거창한 노선에 비해서 아주 초라한 수준인 것 같습니다.
  • socio 2009/10/07 01:35 #

    저도 듣기좋은 수사 뒤에 어떤 구체적인 방안이 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말씀해주신대로 활동 면에서 기존 학생운동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제가 알기로는 행진은 알튀세주의 계열로 알고 있는데 하는거 보면 알튀세와는 정 반대로 가고 있는듯-_-(물론 알튀세가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 언럭키즈 2009/10/04 13:23 #

    유도심문의 느낌마저 나는군요. =_=;;
  • socio 2009/10/07 01:35 #

    노골적이죠-_-
  • sociodemocrat 2009/10/04 22:26 #

    특정 캠퍼스의 학생행진 지부가 아니라 '전국'학생행진 본부에서 나온 문건이면, 정말 전국이라는 이름이 아깝군요.

    사실 저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고전적 의미의 사회민주주의 아닙니까? 그냥 사회주의 포럼이라고 하면 될텐데 얄팍하게 민주/반민주 구도에 편승해서 민주주의를 자기만의 뜻으로 전유하려는 알량한 속셈이 괘씸하군요.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화를 했는데도 우리의 삶이 팍팍하므로 현행 민주주의 제도자체가 잘못됐다! 라는 근본주의적 결론으로 유도심문을 하고 있는....

    사실 이런 식의 스탈린주의적 운동(그러니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완성을 놓고 3단계냐, 4단계냐 하는 것만 다른 NL, PD 모두)이 더이상 '대중적으로' 먹혀든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운동권 로망을 가진 대학 초년생들이나, 초보들에게는 여전히 매력적인 대안일 수 있다는 점이 맘에 걸리네요. 어쩄든 최소한 내적 동질감을 지니고 재밌는 동아리 활동은 해나가는 모양이니 말이죠.

    그나저나 연휴기간에도 열독하셨군요.
  • socio 2009/10/07 01:38 #

    그나마 다행히도 연세대 지부에서 한 것이고, 수정 설문지를 최근에서야 돌리고 있다고 합니다.

    계속 민주주의 민주주의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고찰보다는 형이상학적 개념이자 유토피아로서의 민주주의를 설정한 후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으로 채워넣으려는 욕망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휴 기간에 집에도 안내려갔고, 친구들은 다 내려갔으니 할 게 책 읽는 것 밖에 없었죠 ㅠ_ㅠ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